LIFE

타이포그래피라는 기묘한 이야기

기묘한 타이포그래피적 이야기.

프로필 by ESQUIRE 2020.12.06
 
 

 타이포그래피라는 기묘한 이야기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를 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이 드라마의 배경은 1980년대 미국의 작은 마을이다. 주인공 아이들은 워키토키로 수다를 떨어대며, 배경음악으로는 올드 팝이 흘러나온다. 1976년식 포드 핀토나 1979년식 쉐보레 카마로 같은 빈티지 카들이 보무도 당당히 주차돼 있는 가운데, 초자연적 사건들이 벌어진다. <기묘한 이야기>는 레트로 마니아들을 위한 ‘세계’ 자체인 셈이다.
 
이 세계의 초입에는 근사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검은 바탕과 함께 ‘Stranger Things’라는 글자가 홀로 붉게 빛난다. 스티븐 킹의 1980년대 소설책 커버를 숱하게 장식한 바 있는 ‘ITC Benguiat(ICT 벵기어트)’ 서체로 디자인한 타이포그래피다. 1978년 만들어진 이 서체는 대중을 <기묘한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는 사이니지인 동시에 저 표지판 너머에 뭐가 있을지 짐작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의 작품명처럼 음산하고 기기묘묘한 ‘그것(It)’이 느껴진다. 타이틀 로고를 마주할 때, 사람들이 본 것은 글자가 아니라 ‘기묘한 이야기’라는 하나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연 이 글자, 이 타이포그래피, 에드 벵기어트(Ed Benguiat)다운 기묘한 물건이다. Stranger Typographic Things!
 
2020년 10월 15일, 20세기 후반 최고의 서체 디자이너로 손꼽히던 에드 벵기어트가 별세했다. ITC 벵기어트는 그가 디자인한 수많은 서체 가운데 하나다. 재즈 연주자로 살아가다 뒤늦게 디자인 분야에 입문한 그는, 1953년부터 <에스콰이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스콰이어>, <플레이보이>, <뉴욕 타임스>등 매체들의 제호 디자인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나 포드 등 상업 제품의 로고가 전부 그의 솜씨다. 그의 별세 이후 <뉴욕 타임스> 등 각종 외신들은 그의 부고 소식을 크게 전하며 애도를 표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의 별세 소식은 단신으로 마무리됐지만,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오래전 미국에 거주하는 어느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기가 아는 한 백인 청년이 말하길, <플레이보이> 제호만 봐도 아랫도리가 뭉근해진다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다. 타이포그래피가 한 인간을 신체적으로 흥분시키기도 하다니. 이 또한 에드 벵기어트의 솜씨였을 것이다.
 
타이포그래피란 간단히 말해 ‘글자를 디자인적으로 다루는 작업’이다. 서체 선택, 자간 설정, 문장 배열 등이 오롯이 타이포그래피 과정이다. 에드 벵기어트가 디자인에서 가장 중시한 것 역시 글꼴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글자 사이의 간격이나 글꼴의 비율이었다.
 
사실 타이포그래피의 핵심은 글자를 글자(문자)로 대하는 게 아니다. 이미지(그래픽)로 봐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타이포그래피는 일반 대중은 물론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는 일상에서 가장 쉽게 감각되는 디자인 분야다. 우리 모두 ‘진지한 궁서체’라는 공식을 체득하고 있지 않은가? 궁서체를 ‘진지한 표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궁서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글자를 표정과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듯 타이포그래피는 전문 영역이기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커뮤니케이션 언어인 셈이다. 
 
지난 몇 년간, 디자이너들의 전문 영역에 갇혀있던 타이포그래피가 기업과 대중 간 커뮤니케이션 언어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업 전용 서체들이 그 예시다. 이런 전용 서체는 각 브랜드 및 제품 이미지를 전달하는 표정이자 말투다. 글자의 다룸새와 놓임새, 즉 타이포그래피로써 기업은 얼굴과 목소리를 부여받는다. 인상과 음성이 좋은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인상과 목소리를 가진 기업은 그렇게 고객과의 친밀도를 높이게 된다. 타이포그래피는 이제 브랜딩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른바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이다. 타이포브랜딩의 대표적인 최근 사례로는 게임 개발사인 ‘위메이드’를 들 수 있겠다. 브랜드 리뉴얼 과정에서 철저히 글자를 앞세웠고, 기존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에서 현재 사명으로 변경하면서 새 CI와 전용서체 인피니티 산스(Infi nity Sans)를 발표한 것이다.
 
이 전용 서체를 뜯어보면 한글과 라틴 알파벳이 ‘위메이드 그리드’라는 독자적인 양식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작된 글자들은 그룹사 및 14개 계열사들 사이에서 통용된다. 다시 말해 기업 전체가 하나의 표정과 목소리를 갖는 것이다. 
 
그다음 CI는 인피니티 산스의 글자들(W, E, M, A, D, E)을 조합한 로고타이프 형태다. 글자를 붙여놓든 떼어놓든 그 자체로 브랜드 이미지를 발산한다. ‘W’ 한 글자만으로도 ‘WEMADE’스러운 비주얼을 감각하게끔 설계된 것이다. 기획 초기부터 글자를 그래픽 요소로 삼은 결과다.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통합 브랜딩 전략, 그러니까 타이포브랜딩이란 요컨대 이런 것이다. 전용 서체가 기업 CI로 파생되고, 그룹사와 계열사들이 통일된 글자 체계로 교신한다. 당연히 그룹사·계열사가 발신하는 마케팅 메시지도 일관된 얼굴과 목소리를 유지한다. 기업은 ‘자신의 인상과 음성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므로 이전보다 고도화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펼 수 있다.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스타니슬랍스키의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배우가 자기배역에 따라 ‘언어행동(Verbal Actions)’과 ‘신체행동 (Physical Actions)’을 적확히 설정하는 셈이다. 단순히 글자를 잘 만든다고 될 게 아니다. 폰트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타이포브랜딩은 숙명적 과제처럼 다가온다. 지금 세상은 어떤 얼굴과 목소리를 바랄까. 사람들은 어떤 표정과 음성에 마음을 여는가. 누군가를 손 하나 안 대고 흥분하게(아, 물론 문화적 흥분을 말하는 거다) 만들 방도는 무엇인가. 이 모두가 ‘기묘한 타이포그래피적 이야기(Stranger Typographic Things)’를 향한 고민들이다.
 
WHO`S THE WRITER?
편석훈은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노브랜드>, <빙그레>, <위메이드>, <티머니> 등 다양한 기업의 타이포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편석훈
  • Illustrator 노준구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