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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하이브리드 세리프체의 시대가 열렸다

프로필 by 김현유 2023.06.04
 
버버리가 로고를 바꿨다. 5년 만이다. 새 로고는 영국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니얼 리(Daniel Lee)의 작품이다. 보테가 베네타를 황금기로 이끈 뒤 조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오른 그는, 이적과 동시에 가장 먼저 ‘로고 뜯어고치기’에 나섰다. 기존 로고는 대니얼 리 이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리카르도 티시(Recardo Tisci)가 2018년 선보인 것이었다. 그는 말 탄 기수 심벌을 없애고, 산세리프체로 ‘BURBERRY’를 앞세웠다. 젊은 층, 이른바 ‘MZ’ 공략이 목표였다.
그러나 리카르도 티시의 판단은 적어도 MZ 세대 한 명만은 확실히 만족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생인 대니얼 리는 기존 로고와 달리 세리프 스타일을 소환했다. ‘진격’을 뜻하는 라틴어, ‘Prorsum’ 깃발을 든 기병도 다시 살려냈다. 버버리가 2023년 공개한 새 로고는 2018년의 것과 마찬가지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역시나 호불호가 갈린다. 박수를 보내는 쪽, 고개를 젓는 쪽의 얘기들이 양쪽에서 다 들려온다.
서체 회사를 운영하는 내 입장에서는 익숙한 반응들이다. 출시 초기에는 괴이한 디자인이라며 조롱받다가 서서히 길거리 광고판과 예능 프로그램 자막으로 활발히 쓰인 서체들도 많고, 시장 반응은 찬사와 호평 일색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마니아층만 알고 쓰는 글자로 굳어진 서체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대중의 환호와 고갯짓을 30년 넘게 겪어온 나로서는, 지난 2월 버버리 F/W 패션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새 로고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명품 브랜드의 로고들이 비슷해지기 시작한 건 5~6년쯤 전이다. 과장은 해도 왜곡은 안 한다고 자신하는 업계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2017~2018년 대부분의 명품 로고들은 서로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해졌다. 생 로랑, 발망, 발렌시아가, 샤넬, 리모와까지 모두 로고를 대문자 산세리프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심벌 없이 산세리프체로만 구성된 로고타이프 행렬은 패션 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페이스북,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스포티파이 등 해외 빅테크 기업들도 앞다퉈 기존 로고를 리뉴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산세리프 로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도 호불호는 극명히 갈렸다. 불호를 표명한 쪽에서는 로고에 묻어나던 브랜드 고유의 색깔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이어졌는데, 이는 버버리 로고가 공개됐던 2018년에도 똑같이 나온 이야기다. 여기에 대해 나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럼에도 산세리프 로고 트렌드는 현재 미디어 환경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나는 산세리프로 점철된 로고 디자인과 관련해 여러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산세리프, 그러니까 고딕 계열 로고타이프는 확실히 더 잘 보인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과 알맞다. 나는 오래전부터 미래 서체의 주요 과제가 ‘세리프의 단순함’이라고 강조해왔다.” 당시 내가 내놨던 답변인데, 이는 아직 유효하다. 고딕은 시각적으로도 안정감을 가지고 있으며, 친근감이 느껴지는 서체다. 소비자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데 유리한 글자체다. 획의 두께나 굴림 형태를 통해 부드러움의 정도와 양식을 미세 조정할 수 있다는 것도 고딕의 장점이다.
산세리프가 기업 로고로 활용되는 데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된 트리거 중 하나는 스마트 기기의 등장이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전자책 단말기 등의 기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스타일은 단연 산세리프였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굵기가 동일하고 장식이 없는 고딕 계열 산세리프는 기존의 인쇄매체는 물론 조그맣고 화소가 낮은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포맷에서 적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은 이 때문에 젊은 세대들의 눈에 익숙할 고딕 서체를 로고타이프로 사용했다. 여기서 생겨난 부작용이 바로 ‘여기도 산세리프, 저기도 산세리프’였다. 가독성 좋게 디자인하기 위해 서체 디자인을 단순화하다 보니 결국 다 비슷해져버린, 그야말로 ‘웃픈’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가. 시대는 또 발전했고, 이제는 명조 계열 세리프체까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환경이 조성되었다. 2020년대 들어 400 PPI(Pixels Per Inch)를 넘는 스마트폰이 주류가 되며 굵기가 동일하지 않고 장식이 있는 세리프체도 기기 내에서 깨지지 않고 선명하게 구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버버리의 새 로고는 그 와중에 등장했다.
사실 젊은 디자이너 대니얼 리가 선보인 새로운 버버리 로고도 완전한 세리프체는 아니다. ‘하이브리드 계열’의 세리프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서체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보면 ‘세리프의 느낌을 준 산세리프체’ 내지는 ‘산세리프와 세리프의 중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버버리의 새 로고 이후 대산세리프 로고 시대가 저물고, ‘대하이브리드 세리프 시대’가 열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명조인 듯 명조 아닌, 기초 재질은 고딕이면서 명조의 특질까지 흡수한, 또는 명조의 얼굴로 고딕의 표정을 짓는, 한마디로 무경계의 스타일.
산세리프를 넘어 세리프체까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환경이 조성된 현재, 서체를 활용한 로고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다들 알다시피 요즘은 ‘브랜딩’이 제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이전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제품 자체의 디자인보다, 브랜딩으로 다져진 로고가 소비자의 구매를 결정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인 만큼 로고 속 서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 브랜딩이 중요한 명품 패션 브랜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브랜딩에서 서체는 단순히 ‘글자’가 아니다. ‘글자’라는 경계를 넘어 소비자와 소통하고 브랜드를 알리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과거 인쇄라는 정적인 미디어에서만 쓰였던 서체는 최근 들어 다양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퍼포먼스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관념적이고 정적인 표현만 가능했던 ‘타이포그래피’를 넘어, ‘타이포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시대가 온 것이다. 글자를 글자로 바라보지 않고, 그래픽 이미지나 놀이와 같은 다양한 도구로 보는 순간 그 한계는 사라진다. ‘무경계의 스타일’인 버버리 로고는 그런 점에서 글자를 앞세운 브랜딩 전략과 서체 디자인 업계 자체에 새로운 에라(Era)를 열어젖힌 셈이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에는 날짜 경계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선을 기준으로 한 발짝 뒤는 어제이고, 한 발짝 앞은 오늘이자 내일이다. 결국 우리는 경계에 서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새로운 경계를 넘는 사람들이여, 경계를 아예 없애버리는 능력자들이여, Prorsum!
 
편석훈은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노브랜드·빙그레·위메이드·티머니 등 다양한 기업의 타이포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책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을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편석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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